출생
1545년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현재 인현동)에서 이정과 초계변씨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수등을 지낸 방진의 딸인 상주 방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와의 사이에 2남2녀가 있었다.
무과급제와 함경도 근무
1572년(선조5)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하였다. 그래서 30세가 넘은 1576년(선조9)에야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권지훈련원봉사와 함경도의 동구비보 권관, 발포수군 만호 등을 거쳐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을 지냈다. 하지만 1583년(선조 16)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상을 마치고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로 다시 관직에 나서, 곧바로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다가 여진족의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으면서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당시
이순신의 병력 증원 요청을 병사 이 일이 무시해서 벌어진 일이었으나, 이순신을 패전의 책임으로 장형을 당한 뒤에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전라도 수군절도사
1589년(선조22) 이산해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과 선전관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24)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임진왜란관 해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6일(음력 5월7일) 옥포와 합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옥포해전), 다음날에도 적진포에서 1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적진포해전). 이 전투들에서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해 사천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사천해전). 이 전투에서는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는 당포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으며(당포해전), 7월 13일(음력 6월 5일)에는 왜군이 도주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를 공격해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다(제1차 당항포해전). 이러한 잇따른 승리로 이순신은 정2품 자헌대부가 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다
이순신에게 잇따라 패배한 왜군은 수군의 모든 역량을 전라도로 집결해 맞서려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8월 14일(음력 7월 8일) 견내량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한산도로 유인해 50여척의 왜선을 격파,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한산도대첩). 그리고 안골포에서 지원하러 온 왜군을 다시 물리쳤으며(안골포해전), 10월 5일(음력 9월 1일)에는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에서 왜군의 병선 100여척을 파괴했다. 이러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가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이순신은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으며, 9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음력 3월 4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침시켰고(제2차 당항포해전), 11월 11일(음력 9월 29)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의병과 함세해 거제도 장문포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장문포해전).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 할 것에 대비해 둔전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
원균과 갈등 그리고 파직되어 백의종군
하지만 당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로 옮겼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차례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요시라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량해전에서 대승
그러나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공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1598(선조 31)에도 절이도와 고금도에서 왜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은 그 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노량해전).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추증했다.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 되었으며,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덕풍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충무라는 시호를 받고 영의정에 추증됨
1643년(인조 21)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 10)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1707년(숙종 33)에는 충청도 아산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총'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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